2012. 7. 18.

지하철 안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출근길, 그리고 퇴근길, 그 외 외근시간.
어딘가 모르게 표정들은 침울해 보이고 그들의 형색 또한, 주위 흔한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흔한 이들과는 다르다.
사회복지사인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대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따듯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며 아침이며 점심 저녁 매 끼니를 굶지 않는 따듯한 식단이었다.
사람들의 따듯한 온정이나 시선이라 생각 할 수도 있겠다. 어디까지나 ‘-수 도 있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회로부터 시선을 등지어지거나 시선에 등을 진사람들. 내가 가난뱅이의 부모로부터 태어나는것과 부유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듯 처음부터 노숙인이나, 구걸로 제 삶의 시간을 소비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모습을 그려 오진 않았을 것이다.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원치 않은 선택이었고 그 결과임은 분명할 것 이다.
의식적으로 구걸을 하며 노숙을 하는 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좁고 차가운,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 버린, 온정이라곤 어쩌면 찾아보기힘든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공간,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만든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공강만큼은 상대방을 위한다거나, 배려한다거나 체면을 차리는 공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원하고자 하는 바를 얻기위한 노력은, 어쩌면 그 시작부터가 잘못 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이미 사업가이었거나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로 사회에서 어느정도 역량있는 자들이었으며, 물론, 그렇지 않은 자 들도 있다.
사회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터울속에서 발걸음 따위가 한보 늦어졌다고 해서 도태되거나 제 삶의 빛을 잃어 영혼의 샘이 고갈되어 각박하다거나.
그럴 수도 있는것과 그럴 수는 없는것. 그렇게 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않아도 되는 것.
반드시해야 하는것과 해서는 안되는 일. 이미 우리는 그런 선택에 있어 선택권의 자유가 사라진것은 오래 일런지 모른다.
사회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제 영혼의 샘을 길러 마르지 않도록 갈고 닦는 것은 어느 수준만큼의 여유와 어느 수준만큼의 지식인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다른 모습인 많은 ‘그’들이 지금을 조금이나마 이해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가운 바닥에 앉아 구걸하거나 다리를 절며 구걸을 하고, 혹은 껌이나 도라지, 시금치를 팔기위해 어둡고 차가운 공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주머니 속에 잃어버린 웃음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런지, 잃어버렸던 따듯한 가족, 친구들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런지.
혹은, 먹다남은 술명이 들어있을런지도.
편견과 가식들이 난무하는 이사회에서 우리가 기대하는것은 오로지 성공의 길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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