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8.

이별

짙은 곤색의 장화,
도트 스타킹,
하늘색 야상점퍼,
검 붉은 빛의 웨이브진 단발머리.

흩뿌려진 빗방울 덕분에 안경이 흐려지긴 했지만, 이상하리 만치 그녀의 모습은 눈에 선명했다.
아니, 눈이 아니라 머리에 저절로 그려지고 있었다.
자칫 그녀의 향마저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뱉어낸 담배 연기속으로 그려진 그녀의 모습은 세찬 바람과 빗줄기 속을 흘러 스며지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비로 흐려진 안경을 벗어 들고 치즈저럼 늘어진 가디건에 안경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잘 닦여 질리 없었다. 되려, 얼룩이 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다.
희 뿌여진 눈앞으로 그녀가 곧 사라 질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분주해진 손은 더욱더 안경을 얼룩지게 만들었고, 지문과 물기로 얼룩진 안경을 눈에 가져다 댔을땐,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 였다.
손에 쥐어진 담배마저도 이미 필터 가까이로 타고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만 같았던 그녀가 가까스로 고요해진 내 마음을 흐트려 놓았고,
조급해진 마음은 그녀를 떠나 보내고 말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손에 끼워진 담배가 연기로 온데간 곳 없이 흩어지고 없어지듯 그녀도 홀연히 사라졌다.
알 수 없이 허탈해진 마음과, 아스팔트를 부딪히는 빗소리로 가득 찬 머리.
바람은 몹시도 불어 눈 앞은 비로 가득 했고, 나는 그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으로 넘겨지고 이따금 삼켜지는 침은, 내리는 빗물과도 같았다.

손 등으로 비가 닿았다.
잘게 부셔져 닿은 빗방울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내 손은 비로 가득 젖어 있었다.

'뭐였을까, 누구였을까, 어디로 간걸까, 뭘 좋아할까, 곧 누군갈 만날까, 아니, 집으로 간 걸까, 어디서 나온 거지,? ...'
끝없는 질문이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귀는 차가워 지고, 찬 바람도 가슴 섶으로 숨어 들고 있었다.
머리는 점점 까매지고, 사지와 이격되어 자기력이 생긴 한 덩어리의 작은 껌ㅡ 누군가의 입에서 충분히 단물이 훔쳐지고 돌돌 말려 땅으로 내뱉어진ㅡ 이 되버린 듯 했다.
이내 세상도 어둑해 지고 있었다.
마침 비를 가르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굉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온기를 빼앗겨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가디건ㅡ 치즈처럼 늘어진ㅡ과 빗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 검정색 티셔츠를
손 등으로 털어냈다. 물기를 훔쳐냈다.
잠시 잠깐 현기증이 났지만 걸음을 걷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머리가 가벼워 진 느낌. 몸이 그새 식어 ㅡ컴퓨터의 냉각기가 절전모드로 잠시 멈춘듯 ㅡ 조금은 찌뿌등했다.
기지개를 켜고 뻣뻣해진 목을 돌려 긴장된 근육을 풀어냈다. 아까와는 다른 차가운 한숨이 깊이 품어졌다.

사무실로 터덜터덜 다시 옮겨진 걸음 앞엔, 여전히 사무적인 불빛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분명 어둑해진 바깥보다도 밝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각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되려 어두운 공간으로 먹혀져 들어가는 기분.
벽에 걸린 증정용 거울을 보며 머리에 묻은 물기도 훔쳐냈다. 덕분에 손은 물기가 마를 틈이 없었다.
거울로 고정된 시선 끝에, 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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